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장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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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장인열전

파긴(Federico Faggin), 테드 호프(Ted Hoff), 스탄 마조(Stan Mazor), 마사토시 시마(Masatoshi Shima) 재조명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2)

도구의 존재 그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도구인 경우가 있다. 사실 꽤 많다. 사상이나 관념은 사실 도구의 결과인 경우가 더 많다.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혁명의 와중에 있다면 나중에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그것에 토를 달고 의미를 붙인다. 역사상 중요한 전투에 참가한 병사가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는 것이 업이 아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미디어의 문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마셜 맥루언은 활자 문화가 그 다음의 문화를 규정하였다고 단언한다. 활자로 만들어지는 지식체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지식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활자화 될 수 없는 구전(口傳)의 문화체계는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구텐베르그 이전의 유럽의 문화세계는 구전의 전통이 더 컸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전의 문화는 없어졌다.

사진이 나오면서 사진의 문법이 나왔고 TV의 문법 , 매스미디어의 문법도 나왔다. 문화를 규정하고 포맷을 정해버리는 것이다. 만약 컴퓨터에 이런 일을 적용한다면 컴퓨터의 보급 역시 컴퓨터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이런 일을 걱정하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나 학자들의 몫이며 혁명과 혁신의 주역들은 발전과 생존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닌 일 밖에는 한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원래 미래 창조는 무책임한 것이라고도 한다.

무책임한 것에 대해서는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면죄부를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나오기 10여 년 전의 DNA 발견만 해도 그렇다. DNA의 발견자인 왓슨(James D. Watson)크릭(Francis Crick)은 어떤 사상체계에 의해 DNA를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체에서 유전의 전달물질이 DNA라는 것이 확립될 전후의 파지 바이러스의 연구분파에서 지적인 퍼즐 게임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들은 철학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DNA 발견 이후에 다른 지성인들이 생명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위험성에 대해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왓슨은 DNA 모형을 완성하고 나서야 고민하기 시작했다. 왓슨이 제일 많이 고민한 것은 분자구조의 퍼즐이었으며 그 다음은 다른 경쟁자가 먼저 DNA 모델을 만들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었다.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디지털이라는 것이 주종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번성하면서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역시 나올 때가 되어서 나온 것이지만 그 시작은 정말 우연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다. 엔지니어들이 선택의 가지를 다르게 잡을 여지마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오늘날과 같은 시스템이 된 것이다.


목차

인텔조차 처음에는 탁상용 계산기 정도로 인식

의미를 부여하자면 요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자 명백한 도구이다. 그전까지 정말로 귀하던 컴퓨터가 작은 IC 위에 올라간 사건은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촉발시켰다.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패러다임을 만든 것이다. 그전에도 컴퓨터가 있었으며 IC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IC에 컴퓨터가 들어간 것은 1970년에 접어들 무렵이었고 인텔이라는 신생 기업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탄생시킨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든 인텔조차 처음에는 탁상용 계산기를 조금 일반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생각했고, 그 다음에는 컨트롤러를 생각했다. 퍼스널 컴퓨터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고 그 시장마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목을 매게 되었다. 그리고 시장의 지배자를 자처했다.

처음에는 별로 대단치 않은 출발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 인텔이라는 회사가 몇 명의 엔지니어에 의해 탄생했으며, 그 회사는 집적회로(IC : Integrated Circuit)를 만들기 위해 설립되었다. 인텔이라는 이름은 ‘INTegrated Electronics’라는 평범한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노이스무어가 페어차일드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페어차일드에서 나온 100개가 넘는 회사의 하나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출발 당시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와는 상관없는 회사였다. 인텔은 당시로서는 유망한 아이템인 메모리를 생산하여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회사로 출발하였다.

메모리를 생산하기 위한 야심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웨이퍼를 양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었으나 약간의 수지가 맞는 장사를 원하는 것을 빼고는 특별한 점이 없는 회사였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인텔에서 설계되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CPU가 메모리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컴퓨터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자 부품으로 생각했다.

당시 미국의 컴퓨터 판매량은 약 2만대 정도이고 인텔이 10%의 시장 점유율을 갖는다 해도 2,000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팔아 봐야 회사의 마케팅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인텔뿐만 아니라 훨씬 강력한 회사였던 DEC모토로라 그리고 내셔널 세미컨덕터 같은 회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요즘의 지적재산권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에 봉착하지 않고 초기 컴퓨터 시장이 형성되었다.

퍼스널 컴퓨터가 아닌 터미널을 위한 범용 처리기 정도를 생각했으나 인텔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몇 명의 엔지니어가 자신들만의 컴퓨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하자 PC 왕국의 막이 올랐다. 갑자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시장이 빈약한 하드웨어로부터 탄생하였다. PC 뿐 아니라 디지털 제어기술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컴퓨터가 흔하다는 사실 그 자체, 컴퓨터가 도처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시 컴퓨터의 비약적인 발전을 촉진한 것은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하나의 고안물(artifacts)를 만들어 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 역시 사람들에게 하나의 세계관의 준거 틀과 사고의 도구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CPU와 컴퓨터는 훨씬 전부터 있어 왔지만 저렴한 PC 시장이 형성되면서 ‘규모의 경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돈이 될 것이 점점 분명해지자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이 불붙었다. 이 대목이 당분간 이번 칼럼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경쟁도 군비 경쟁과 마찬가지로 경쟁적으로 싸우면서 스스로 레벨업하는 공진화(co-evolution)의 역사다.


인텔의 초창기를 누빈 사람들

페어차일드의 창업자인 셔만 밀즈 페어차일드(Sher man Mills Fairchild)페어차일드 반도체 이전에는 IBM에 투자했다. 벤처 캐피탈의 시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서 락의 영향으로 젊은 과학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연구 목표는 트랜지스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트랜지스터는 거의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페어차일드에서 트랜지스터 이후 가장 중요한 발명인 Planar 공정을 개발했다. 이 때부터 트랜지스터는 양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새로운 전자산업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만드는 것으로 새롭게 태동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집적 회로는 이 당시 만들어진 방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성공적으로 물건을 팔 수 있었고 창업에 관여한 연구진들도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회사 분위기는 매우 관료주의적이었다. 엔지니어는 그저 개발하고 만드는 사람이었고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엔지니어들은 점차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만드는 반도체회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초기 멤버들은 고민을 하면서도 회사에 남아 있었지만 1967년 사건이 일어난다. 페어차일드가 내셔널 세미컨덕터에 대한 경쟁 체제를 확립하면서 회사 연구원들을 해고시키는 상황이 발생했다. 8명의 설립자 중 노이스무어만이 페어차일드에 남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 회사를 만들기로 하고 자금과 사람을 모았다.

이들의 이름이 업계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회사는 금방 만들어질 수 있었다. 초기부터 매우 유능한 개발자와 영업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지 길더의 <마이크로코즘>과 데이비드 카플란(David Kaplan)의 <실리콘밸리 스토리>는 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결국 1968년에 창업자금 200만 달러의 인텔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인텔이 회사 기밀을 갖고 나갔다면서 인텔을 격렬히 비난했으나 인텔은 기밀을 훔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축적된 디바이스 물리학의 지식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응수했다. 그 당시까지는 특허나 지적재산권을 무기로 사용하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복잡한 소송이 진행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무어노이스의 팀이 독립한 직후 무어의 연구원이었던 페데리코 파긴(Federico Faggin)은 페어차일드에서 MOS(Metal Oxide Semiconductor)를 이용한 실리콘 게이트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인텔도 MOS를 고려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MOS를 이용한 메모리는 하나의 가능성이었으며 인텔의 다른 쪽에서는 바이폴라 공법의 메모리를 개발하고 있었다. 결국은 인텔에서도 MOS를 이용한 메모리가 개발되었다.

당시 인텔에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많았다. 그들 중 테드 호프(Ted Hoff)라는 사람이 있었다. 테드 호프는 회로를 검토하던 중 메모리의 셸을 구성하는 플립플롭으로 반드시 4개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기적으로 리프레시 되기만 하면 하나의 트랜지스터와 커패시터만으로도 메모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로 인해 메모리는 매우 저렴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테드 호프에 의해 DRAM 탄생

테드 호프에 의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함께 인텔의 중요한 발명품인 DRAM이 탄생했다. 1103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DRAM 메모리는 인텔 성장의 견인차이자 돈줄의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10만 달러 정도의 매출이 중요한 계약이었던 인텔은 이후에 수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한다. 얼마 후에는 인텔 내의 다른 팀에 의해 DRAM에 이어 EPROM(Erasable Programable Read Only Memory)이 개발되었다.

EPROM은 그 이전까지의 ROM처럼 내부적인 퓨트를 제거하여 만드는 ROM이 아니라 자외선으로 소거할 수 있고 프로그램 가능한, 따라서 소량 개발에도 적합한 메모리였다. 1702로 명명된 최초의 EPROM 역시 시장을 석권했다. 초기의 EPROM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인텔뿐만 아니라 모스텍, 내셔녈 세미컨덕터,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등 모두 새로운 개념이나 설계도를 페어차일드로부터 카피하고 있었으며, 사람도 역시 페어차일드로부터 채용하였다. 그 당시까지도 이들은 페어칠드런이었던 것이다. 인텔은 페어차일드에서 임시해직 상태에 있던 파긴을 채용하려 하였다.

페어차일드에서 게이트 설계를 했던 파긴은 페어차일드의 자료를 인텔에 넘기는 것을 거부했었다(페어차일드는 설계상의 문제로 메모리 상용화에 실패했다). 노이스무어는 페어차일드에서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두 확보하여 독자적인 상업화에 이용하려 했었다. 파긴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어서 결국 인텔에 붙잡아 놓기로 하였다. 얼마 후 테드 호프와 파긴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개발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고용인이기는 했으나 인텔이 먹고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복잡한 IC의 제조법 자체를 만들었으며 DRAM도 만들었다. 나중에는 이 기술을 종합적으로 동원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었다. 인텔은 그 이후에 NIH (Not Invented Here)라는 말들을 듣곤 했다. 중요한 기술은 모두 인텔에서 나왔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만든 기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비지컴(Busicom), 탁상용 계산기 OEM 생산

개발 인력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관여하고 있는 칩의 종류는 다양했다. 인텔에서 일을 시작한 파긴이 처음 맡은 일은 일본의 비지컴이라는 회사에서 주문한 탁상용 계산기를 일본 엔지니어와 상담하는 일이었다. 비지컴은 계산기에 사용할 수 있는 논리회로 칩을 주문했고 개발비는 10만 달러였다. RAM을 설계 때문에 테드 호프가 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파긴이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파긴은 비지컴과의 상담에서 비지컴이 주문한 칩의 논리적 동작을 범용화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지컴이 주문하는 칩은 거의 하드웨어적인 설계에 많이 의존하지만 파긴은 그 당시 범용으로 사용되던 미니 컴퓨터 PDP-8 같은 컴퓨터의 구성처럼 만들어 볼 것을 고려했다. PDP-8 의 내부 구성은 매우 간단했다. 이미 그 구조도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파긴은 이 같은 방법으로 구현하면 더 유연한 로직이 만들어지고 한 번의 프로그래밍만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자계산기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때마다 다시 논리회로를 설계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파긴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테드 호프와 의논했다. 호프는 며칠이 지나 RAM, ROM, I/O 그리고 CPU 등 4개의 칩으로 구성된 시스템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4개의 컴포넌트로 분리한 후 이들의 설계가 어렵지 않으며 매우 저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비지컴은 이러한 디자인 구상을 매우 환영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이러한 칩을 곧바로 실용화하기에는 인텔의 능력으로는 부족했다. 더욱이 호프는 DRAM 설계로 매우 바빴다. 비지컴과의 약속일이 되기까지 칩의 설계도조차 만들지 못했다. 일본측 기술 책임자인 마사토시 시마는 설계도가 준비 안 된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냈으나, 인텔이 무엇인가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긴은 자신이 일의 책임자이며 시간 내에 일을 끝낼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은 좀더 범용적인 칩을 디자인하고 있음을 시마에게 알려 주었다.

대신 비지컴의 관리팀은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인텔은 많은 출하량을 원하고 있었다. 인텔의 노이스는 파긴과 호프로부터 이 칩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측에 비용을 일부 할인해 주고 라이선스를 변경하기로 하였다. 인텔의 제안은 비지컴이 주문한 칩의 설계는 비지컴이 독점하고, 인텔은 칩을 다시 디자인하고 다른 고객들에게도 팔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기로 한 것이다. 비지컴은 이러한 계약에 동의했다. 이는 인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정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마사토시 시마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지컴에 입사하기 전 학생시절에 화약 폭발로 손가락을 잃었다. 그 당시 부상으로 입은 장애로 우울한 세월을 보내던 시마는 비지컴에 입사하기 전 화학을 전공했다. 비지콤에서는 소프트웨어 업무를 담당하다 재미가 없어져서 탁상용 계산기를 만드는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특별한 업무 배경은 없었지만 몇 권의 책을 읽은 후 시마는 트랜지스터와 간단한 로직을 이용하여 계산기를 직접 디자인했다. 그 당시에는 계산기의 로직회로가 간단하여 시마는 전자회로를 모두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계산기에 사용되는 200개 미만의 DTL 로직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DTL은 다이오드로가 논리 연산에 관여하는 아주 간단하고 원시적인 회로다. 이들이 바로 연산장치이자 기억장치였기 때문에 시마는 나름대로 컴퓨터와 논리회로에 대한 배경을 갖게 되었다. 초창기의 미니컴퓨터들의 회로도는 놀랄 만큼 간단했다.

인텔 4004,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비지컴은 그 당시로서는 경쟁자도 별로 없고 마진이 많이 남는 탁상용 계산기를 OEM으로 다른 회사에 납품하고 있었다. 주문자마다 조금씩 원하는 기능이 달랐다. 시마의 직장 상사는 다양한 경력을 가진 엔지니어로 언제나 새로운 로직을 설계해야 하는 일에 점차 식상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시마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프로그래밍 능력을 갖춘 탁상용 계산기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 계산기는 LSI로 만들어져야 하며 단순한 계산 용도를 떠나 금전출납기나 다른 과학 계산 용도로도 쓸 수 있는 범용적인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시마는 미국으로 건너가 실리콘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회사인 모스텍(MOSTEK)과 인텔의 기술자를 만난다. 모스텍은 이미 계산기용 칩을 발매하고 있었으나 시마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칩을 원했다. 인텔과의 상담에서 시마는 컴퓨터에 대해 수많은 경험을 한 테드 호프에게 끌려 칩의 설계를 인텔에게 맡기기로 했다.

테드 호프는 PDP-8이나 다른 컴퓨터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본격적인 컴퓨터를 하나도 모르던 시마는 인텔과 함께 일하면서 나중에는 명령어를 만들기도 하고 기능 설명서까지 만들게 되었다.

사실상 마이크로프로세서 담당자가 2명밖에 없었던 인텔에서 칩 설계와 생산을 담당한 파긴은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했다. 불과 몇 달만에 네 가지의 컴포넌트를 모두 만들어야 했던 파긴은 밤샘작업을 밥 먹듯이 했으나 정시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사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런 악재들이 겹친 데다 관리자와 사이가 나빠진 파긴은 결국 나중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런 산고를 거쳐 1970년 말 4004라는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만들어졌다.

인텔에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해 특별히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컴퓨터의 구조를 칩에다 구현한 것을 빼고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으며 메모리 회사인 인텔 입장에서는 중요한 아이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지컴 측에서도 특허 신청을 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다. 인텔이 특허를 신청하지 않은 사실 역시 컴퓨터 역사상 중요한 결정이었다. 인텔은 1971년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다.

하지만 세상이 떠들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4004에 관심을 보인 것은 샤프 같은 일본 회사들과 NCR 정도였다. 4004는 4비트의 칩이었고 많은 것들이 부족했다. 그러나 계산기로서는 충분한 성능이었다. 이 칩이 성능이 더 좋아지고 8비트가 돼서야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 관여한 마사토시 시마파긴, 테드 호프, 스탄 마조 등의 프로세서 개발과정 이야기는 중요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신비로운 인물인 시마의 이야기도 더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컴퓨터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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