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앱스들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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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앱스들의 출현

안윤호 mindengine@freechal.com - 2007년 9월호

목차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

사람들의 절망이나 도전을 위한 모색은 가끔씩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1970년대 냉전세대의 광기어린 분위기 속에서 반도체 회사의 쓰레기통(?)을 뒤지던 10대들에 의해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필자는 지난 호 컬럼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스티븐 레비가 쓴 <해커>는 이 같은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애플, 아타리, 코모도어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 같은 회사들은 그 당시의 역사(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해커의 2부인 하드웨어 해커 편에는 펠젠스타인이라는 사회주의 이념과는 상관이 없는 다양한 과거를 가진 하드웨어 해커들이 등장한다.

순수한 기술적인 관심, 컴퓨터를 만들고 싶다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모이고 이들로부터 마이크로컴퓨터와 퍼스널 컴퓨터산업이 시동되었다. 실리콘밸리 키드들은 Don Lancaster의 <TTL cookbook>이나 Adam Osborne의 <Introduction to Microcomputer> 같은 책을 보고는 개발에 빠져 들었다. 사실 당시 컴퓨터의 개발보다 재미있거나 새로운 기술적 돌파구는 별로 없었다. 첨단이면서도 어렵지 않았고 초창기의 회사들은 쉽게 떼돈을 벌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른바 ‘블루오션’이었다.

8비트 시장 형성

앞에서 말한 스티븐 레비의 책을 독자들이 읽어보더라도(다른 책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과거의 기록이나 파편들이 말하는 8비트 컴퓨터를 본 적조차 없기 때문에 책 내용의 일부는 상상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드디스크는 나오지도 않았으며 플로피 디스크도 없던 당시의 진보된 저장매체가 그나마 카세트테이프였다.

모뎀의 소리와 같은 잡음소리가 1과 0을 담는 전부였다. 모뎀의 소리를 음성으로 테이프에 담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10K 바이트 정도면 커다란 데이터였으며 심한 경우에는 입력을 기다리는 “>”프롬프트를 보기 위해 몇 분을 카세트 소리를 들어가며 기다려야 했다. 그 보다도 못한 종이테이프를 사용하는 기종도 많았다. 요즘은 박물관에 보관돼 있거나 쓰레기 매립장에서나 찾을 수 있는 이러한 기계들에 역사의 단서가 묻혀 있다. 이 기계들의 잔해와 기억의 파편 속에서 PC 왕국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

대체로 초기의 제품들은 성능 상 도저히 컴퓨터라고 부를 수 없는 디지털 전자장치 수준이지만 화면이 있었고 키보드가 있었으며 간단한 연산도 가능했다. 1975년부터 1977년간에 걸쳐 갑자기 엄청난 수의 마이크로컴퓨터들 중 많은 수가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멤버들로부터 출발하였다.

애플은 그 이전까지는 컴퓨터라고 부르기 힘든 제품들과 차별화된, 그래도 키보드와 디스플레이 화면이 있는 제품을 출하하면서 초기에 시장으로 성공적으로 진입한 회사였다. 그보다 조금 앞서 빌 게이츠MS는 초기의 마이크로컴퓨터들에서 동작하는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구현하면서 출발하였다.

디지털 로직 회로설계에 소질이 있던 워즈니악(Steve Wozniak)스티브 잡스와 함께 차고에서 애플 I을 만들었다. 이들은 홈브루 컴퓨터의 일원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근처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계산기와 폭스바겐 밴을 팔아 자금을 만들고 잡스의 집에 있던 차고에서 애플 I을 개발했다. 목재 합판에 회로판과 키보드를 얹은 애플 I은 근처의 전파상 같은 곳에서 바로 팔려나갔고 작은 규모의 투자를 받아 애플 II가 개발되었다.

애플 II와 다른 마이크로컴퓨터들의 초기에는 열광적인 수요가 있었다. 초기에 워즈니악의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최선의 결과를 내는 마법사같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워즈니악의 자서전이 얼마전 출판되었다

애플 II는 하얀 플라스틱 케이스 속에 담겨 있었으며 제대로 된 전자제품 같이 보이는 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좋아했기 때문에 초기에 애플 II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나 곧바로 문제에 봉착하였다.

애플뿐만 아니라 다른 컴퓨터 업체들도 갑자기 같은 문제에 봉착하였다. 그 문제란 바로 컴퓨터를 가지고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초기의 판매량은 컴퓨터 자체에 흥미를 갖는 기술지향적인 집단이 취미로 구매하였으나 일반인들은 베이직만 들어 있는 컴퓨터를 가지고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로 인해 판매는 갑자기 정체되기 시작했다. 컴퓨터광이나 게임 마니아들에 대한 컴퓨터 판매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모처럼 일어나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 산업은 쇠락 국면에 들어가는 듯 했다. 새로운 수요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로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자랑하던 기술적인 사용자 집단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을 제외하면 전문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료처리용 소프트웨어가 몇 종 발매되고 있었고, 일반인을 위하여 간단한 데이터베이스와 회계용 패키지들이 개발되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당시의 하드웨어에 적용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마이크로컴퓨터 혁명은 5년을 못 넘기고 그 불씨가 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상이 떠돌기도 했다.

비지칼크

VisiCalc

<우연의 왕국>이라는 로버트 크린즐리의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은 인간적인 약점과 실수투성이의 주인공들로부터 실리콘밸리의 거대 산업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로버트 크린즐리는 IT 세계의 가십성 기사를 많이 썼으며 ‘현장으로부터의 목소리’라는 컬럼을 연재했다. 사람들은 인포월드에 실린 크린즐리의 글을 좋아했다.

크린즐리는 미국의 정보산업에 대해 선정적이고 신랄한 글을 썼다. IT 산업에서는 루머와 소문이 일종의 법칙과 같은 것이며 일종의 유용한 기능을 담당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애플의 12번째 입사한 사원이기도 했고 스탠포드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PBS에서 I,Cringely라는 코너를 담당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람이라고 한다. 나중에는 Triump of the nerds 라는 책과 프로그램으로 다시 유명세를 탔다.

<우연의 왕국>은 얼마나 많은 우연(통제할 수 없는 변수)이 산업의 부침에 작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의 성공은 우연에 좌우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책에서 크린즐리는 성공의 제일 큰 요소가 운(재수)이며 절대로 운이 없는 사람들과는 사업을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하고 있다. 노력이나 실력보다도 운이 최고라고 단언한다.

애플 II를 개발하던 당시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우연히 개발된 스프레드시트가 애플 II의 진입장벽을 낮추어 주었다. 스프레드시트는 지금의 MS 액셀의 전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액셀 이전에는 로터스 1-2-3가, 그리고 최초의 스프레드시트로는 비지칼크(VisiCalC)가 있었다. 비지칼크는 의도된 것도 기획된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비지칼크는 기업체 중간 관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메인프레임을 사용하지는 못했으나 계산 처리를 하고 중소기업의 고객들에게 상담을 해주어야 하는 관리자들은 비지칼크의 사용법을 빠르게 배웠다. 비지칼크는 초기에 애플 II 기종에서만 동작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애플 II는 호사가들의 장난감이 아닌 사무용 기기로 사용될 수 있었으며, 메인프레임미니컴퓨터가 아닌 퍼스널 컴퓨터의 새로운 영역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비지칼크를 사기 위해서 사람들은 애플 II를 구입하였다. 플로피 디스크도 고가이기는 하지만 구입하였으며 나중에 플로피 디스크 사용자 중에는 본격적인 운영체제인 CP/M애플에서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다. 퍼스널 컴퓨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사무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사람들이 베이직이나 다른 골치 아픈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개발자 댄 브리클린(Dan Bricklin)은 프로그래머 생활을 하기는 하였으나 졸업 후 경영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경영대학원에서 필요했던 기능을 구현하다 보니 스프레드시트가 개발되었다.

당연히 잡스도 컬트 아이콘이 되었다.

대학원생이던 그는 계산마다 일일이 프로그래밍하는 대신 융통성 있는 포맷의 프로그래밍을 모색하였다. 비디오 게임기와 유사한 모양의 휴대용 계산기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하드웨어 기술은 그 정도의 수준을 만족할 수 없었다.

브리클린의 대학원 재학 시절 제조업 분야의 강의는 커다란 칠판에 시간, 재료, 인건비 등을 적고 이들을 항목별로 나누어 적고 따로 계산을 하며 정리하였다. 인건비나 임금비율이 한 항목이라도 바뀌면 칠판 몇 개를 다시 계산해야 했다.

브리클린은 이런 일반적인 계산방식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계산방식이 주어지고 이들의 관계만 설정되면 하나의 항목이 바뀌어도 모두 자동으로 재계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엑셀의 사용자들이 계산 테이블을 만드는 방식과 같다. 브리클린은 주말을 이용하여 자신의 버전을 테스트하였다. 처음에는 베이직으로 작성되어 매우 느리기는 하였으나 기본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하나의 항을 변경시키면 관련된 모든 계수가 바뀌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사용자들은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컴퓨터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어도 간단한 프로그래밍만으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 회계사들이 회계 장부를 조작할 때에도 최고의 제품이었다. 숫자만 조금 바꾸면 훌륭한 장부를 만들 수 있었다.

우연하게도 1978년 초에 브리클린비지칼크를 만들어 테스트하고 있을 때 시장은 애플 II, 코모도어 PET라디오 샥TRS-80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브리클린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기 때문에 특정 컴퓨터에 대한 선호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의 개발 동료인 밥 프랑크스톤과 함께 비지칼크를 작성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업자로부터 빌려온 컴퓨터가 바로 애플 II였다.

한 달을 예상한 개발기간이 1년 정도로 연장되고 시장에 나왔을 때 처음의 반응은 별로 없었다. 애플의 반응도 매우 미온적이었다. 제품이 출하되어도 판매가 신통치 않았으며 애플 이외에 메이커의 반응도 미온적이었다. 당시까지는 이러한 제품이 없었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스프레드시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애플리케이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초기에 비지칼크를 구입한 사람들 중에는 기업인들도 끼여 있었다. 이들은 복잡하지 않은 비지칼크로 자신들의 데이터를 처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프레드시트의 중요성을 즉각 파악하였다. 유용성이 입증되면서 기업이나 회사에서도 비지칼크를 구입하였고 이에 따라 애플 II의 판매도 증가하였다. 당시 애플의 판매 전략의 우수성보다는 비지칼크를 사용한 열성적인 팬들에 의해 애플 II가 성공할 수 있었다. 애플의 성공 이면에는 비지칼크라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있었던 것이다. 애플의 성공은 외부적인 요소도 있었던 것이다.

비지칼크는 이른바 ‘킬러 애플리케이션’ 또는 ‘킬러앱스’라고 불리는 제품들의 효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킬러앱스들은 최초로 시장에 나와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시장을 지배하는 제품들을 말한다. 킬러앱스들의 성공은 전혀 무관한 제품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시장을 재구성하며 기존의 제품들을 시장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경쟁사, 제품, 회사 모두의 관계는 혼돈에 빠지고 시간이 지나야 재편이 이루어진다.

비지칼크 이후로 기업에서는 퍼스널 컴퓨터를 활발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메인프레임 컴퓨터미니컴퓨터에 대한 의존이 낮아지고 시장의 개편이 일어났다. 8비트 시장에서 애플 II는 일종의 킬러앱스가 되었다. 기술지향적인 사용자만의 시장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면서 갑자기 커다란 수요가 일어났다. 기술적인 해커들만 마이크로컴퓨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나중인 1990년대 초반에 나타난 다른 부류의 킬러앱스인 월드 와이드 웹(WWW)의 등장은 현재에도 모든 것을 재정립하고 있다. 킬러앱스는 개발자에게 부나 명성을 갖다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킬러앱스에 의해 고사당하는 사람들도 많다. 킬러앱스는 우연히 나타나 세이(장 뱁티스트 세이)의 법칙인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등식을 생각나게 한다.

킬러앱스의 탄생은 하나의 징표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것이 무엇인가가 안개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듯 나타나고 시장은 재편된다. 초기의 킬러앱스는 무시되거나 비난받지만 얼마 후에는 신성시된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킬러앱스를 알아보기도 힘드는 판에 기획하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CP/M

MS가 베이직만으로 성공적인 비즈니스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의 컴퓨터들이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운영체제라기보다는 모니터 롬에 가까운 마이크로컴퓨터의 구조가 그러했다. 이 ROM은 컴퓨터의 부팅부터 화면에 글자를 띄우기까지 간단한 초기화를 한다. 디스크 드라이버가 없는 초창기의 애플 II 컴퓨터를 켜면 1~2초 만에 ‘삑’하는 소리와 함께 'Apple II'라는 글자가 나오고 바로 베이직 인터프리터가 나오는 구조였다.

DOS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CP/M이라는 운영체제를 아는 독자는 아마 소수일 것이다. 이른바 DOS(Disk Operating System)라는 것은 70년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도전이었다. DOS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적어도 플로피 디스크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하드디스크는 훨씬 더 뒤에 나온다. 요즘은 구별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8인치짜리의 플로피를 플로피 디스크(disk)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나온 5.25인치와 3.5인치를 플로피 디스켓(diskette)이라고 불렀다.


8인치, 5.25 인치, 3.5 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크기 비교


디스크보다 작다는 뜻이다. 197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에는 회사들이 DOS를 고려할 때는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CP/M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만의 DOS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애플은 애플 도스를, 다른 회사는 회사의 이름을 딴 자신들만의 DOS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시장에 일찌감치 진입한 CP/M이 있었다.

CP/M과 기타 운영체제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마땅할 산업계 표준인 CP/M은 신기하게도 다른 회사들이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 운영체제를 만든 사람은 게리 킬달(Gary Kildall)로 일종의 천재였지만, 비즈니스 재능이 부족한 특이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킬달은 한때 매우 성공적인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 Institute)의 창업자이자 사장이었다. 게리 킬달이 비즈니스적인 능력을 함께 발휘했다면 적어도 운영체제에서는 MS를 떨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로서는 매우 출중한 사람이었다.

1973년 슈가트(Shugart)에서 인텔에 샘플로 8인치의 디스크 드라이브를 기증하자 그 전부터 인텔과 일해 왔던 킬달은 이 장치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개발장비 엔지니어이던 존 토로드와 함께 개발장비를 위한 디스크 컨트롤러를 만들었다. 디스크 제어기가 곧바로 만들어졌고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이 제어기를 컨트롤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CP/M의 조상이 되었다.

CP/MPDP-10VMS 운영체제에서 명령어와 파일 이름을 구성하는 방법을 차용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였던 고든 유뱅크스(Gordon Eubanks)는 원시적인 CP/M을 위한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었다. 킬달은 인텔과는 아주 친했고 인텔의 8008 시절부터 디버거시뮬레이터를 만들어 왔던 킬달이었으므로 MS보다 더 빠른 시기에 이미 운영체제와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갖고 있었다.

1976년 이전의 초기 버전들은 공공시설인 해군연구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개되어 돌아다녔고 해군연구소를 나온 후 곧 바로 토로드와 함께 DRI의 전신인 Intergalactic Digital Research를 만들었다

놀랄 만큼 많이 팔린 CP/M-80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1977년이 되자 회사들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회사들은 자신들의 BIOS를 만들고 이 바이오스는 CP/M을 성공적으로 로드하면 되었다. 킬달의 회사 이름은 다시 galactic을 빼고 Digital Research Institute로 변경되었다.

수많은 기계들이 CP/M을 이식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CP/MApple, Radio Shack, Commodore, Zenith, Sharp 같은 거의 모든 기종에서 동작했다. 기계의 성능은 카세트조차 없던 초기의 기계들과 비슷했으나 메모리를 늘리고 디스크 컨트롤러만 달면 CP/M을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MS도 CP/M에 관여하고 있었다. MS에서 개발된 소프트 카드라는 제품으로 이미 6502라는 다른 CPU를 사용하고 있던 애플에 카드를 꽂으면 Z80 CPU 기계로 바뀌고 당연히 애플에서도 CP/M을 즐길 수 있었다.

아무튼 CP/M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다른 기계에서도 최소한의 수정만으로도 잘 동작했다. 워드프로세서와 데이터베이스를 포함한 킬러앱스들이 CP/M에서 자리잡았다. 표준 플랫폼이 만들어진 것이고 이들은 나중에 조금만 변경하면 MS-DOS 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다. 워드스타, 멀티플랜, dBase같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거나 다른 시스템으로부터 CP/M으로 이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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