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짧아지는 개발자의 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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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짧아지는 개발자의 수명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쟁


안윤호 | mindengine@freechal.com


혁명과 발전이 너무 과도하게 진행될 때 그 구성원들의 역할은 자칫 쓸모없게 변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엔지니어링의 세계는 이런 경향이 더 심한 편인 것 같다. 컴퓨터나 반도체 산업에 종사한 주요 개발자는 프로세서 몇 개를 개발하고 2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한때 개발의 영웅도 운이 나쁘면 불과 2-3년 만에 별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변하곤 했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가 무서운 속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변화에 잘 적응해야 한다거나 대세를 빠르게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패러다임의 변동은 지각의 변동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큰 변화이며 그 속에서 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세간에 떠도는 말은 현실성이 없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변화가 대세라면 누군인들 따라가지 않겠는가?

빠르고 혁명적인 발전이 연속되는 것, 이른바 단절적인 변화가 오는 경우 서로 경쟁하고 있는 몇 개의 가능성 중 하나에 '올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잘 되면 많은 포상이 주어지고 잘 안 되면 심각한 피해가 예상된다. 판단의 기준은 늘 모호하며 많은 루머가 사실을 포장하고 있다.

루머가 강해지면 사실을 뒤엎기도 한다.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빙산처럼 흐릿하게 물체를 짐작만하다가 갑자기 눈앞에 거대한 실제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나타난다. 사람들의 판단력과 능력은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요소가 '운(運)'일거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목차

갑자기 열린 8비트시대

1970년대와 80년대의 실리콘밸리의 전형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아직 LSI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 IC를 찍어내던 회사들이 갑자기 컴퓨터 칩을 만드는 회사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텔의 뒤를 이어 모토로라TI(Texas Instrument)가 가세하고 MOSTEK, Rockwell, ZILOG 같은 회사들이 갑자기 다양한 종류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TV 수상기나 라디오를 만들던 회사들이 디지털 두뇌를 만들기 시작했다.

8비트 프로세서의 시대가 갑자기 열린 것이다. 수없이 많은 8비트 프로세서와 컨트롤러 가운데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기종은 몇 개가 안 된다. 비교적 장수하고 사람들의 머리에 남아있는 프로세서를 꼽자면 인텔의 8080, 8085 모토롤라의 6800 그리고 모스텍의 6502자일로그의 Z80 정도다. 그 중에서 시장을 지배한 기종은 Z806502였다. 6502애플에 사용되어 퍼스널 컴퓨터의 혁명을 이끌었고 나머지 시장은 8080Z80이 지배했다. 이들의 지배기간은 꽤 길었다. 프로세서의 가격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생산량은 늘어나는 사이에 또 새로운 것들이 튀어나왔다.

설계자들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개념을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칩들이 나타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퍼스널 컴퓨터 시장이 나타났다. 곧이어 차기 주력기종의 경쟁은 8비트에서 16비트로 변하고 얼마 후에는 완전히 새로운 설계의 사상과 방법이 나타났다. 다시 몇 년이 지나자 예상치 못한 32비트 프로세서들이 나타났다.(그중의 하나가 80386이었다.) 더구나 서로 다른 곳에서 연구되던 것들이 빠른 시간에 시장에 수용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시장은 종잡을 수 없으며 개발자들도 차분하게 연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추구한 방향이 맞는 것이었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변덕이 심한 시장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제품이라도 시장이 외면하면 끝장이었다.

그래서 주 아키텍트들은 길어야 1-2 세대의 프로세서에 대한 영감만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곳에서 개발된 경쟁관계의 새로운 아키텍처가 성공적이라면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도 이런 모습일지 모르지만 70년대에는 더 심했다. 제품의 개발자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와 80년대의 성공적인 8비트 시스템 엔지니어들은 갑자기 16비트로 시장이 변해버리자 할 일이 없어졌다.

다른 제품의 개발로 바꾸던가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90년대가 되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웹이라는 단절적인 기술이 나오고 인터넷이 폭발했으며 그 다음은 무한한 다양성의 또 다른 시장과 제품이 나타났다.

개발자들이나 아키텍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정말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또 다른 잣대가 하나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떨 때는 어떤 순간의 어떤 결정적인 상황에 놓인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상황에 있고 싶다고 해서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전투들이나 중요한 순간들처럼. 고객이나 사용자들도 마찬가지다. 정작 무엇이 개발자들의 제품을 고르게 했는지도 모르며, 나중에 생각해 보아도 그 선택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견조차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시장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얼마만큼 지배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제품이나 결정적인 제품(킬러앱스 같은)에 대해서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다.


시마8080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비지컴이라는 일본 회사의 주문을 인텔이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만들어진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시마(Masatoshi Shima)는 당시의 비지컴의 사원으로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조정자와 산파 역할을 하다가 설계와 제작에 참여하고 나중에 핵심적인 8080의 설계자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자일로그의 Z80의 설계자로 , 16비트 Z8000의 설계자가 되었다가 다시 일본의 인텔 연구소로 복귀했다.

8비트 시절에는 시마의 팬들이 많았고 전설적인 일화들이 남아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몇 백개의 게이트를 머릿속에 기억하면서 검증한다거나 프로세서의 설계를 거의 혼자서 끝내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프로세서 설계를 디버그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마Z8000 설계에서 고전했다. 프로세서의 설계는 더 이상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불과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프로세서는 빠른 속도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마는 나중에 IEEE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회고했다, ieee의 역사적 자료들을 보관하는 카테고리에 인터뷰 전문이 있다.[1]

인텔에서 우여곡절 끝에 4004가 발매되었으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주요 고객인 대기업의 기술자들은 프로그래밍이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대해 잘 몰랐다. 새로운 고객이 나타났다. CTC(Computer Terminal Corporation)라는 단말기 업체였다. 이 회사는 비지컴에서 요구했던 4비트가 아니라 ASCII 문자를 한 번에 연산할 수 있는 8비트를 원했다. 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8008로 명명했다.

8008은 사용이 어렵기는 했으나 성능이 개선되었고 산업용으로나 데스크톱용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8008 역시 결정적으로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사용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8008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30개 정도의 TTL8008에 더해야 했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클만큼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8008의 개발이 끝나고 노이스(Robert Noyce)비지컴을 떠나 리코에서 개발자로 있던 시마를 불러들였다. 그때까지 시마에 대해 전혀 모르던 리코의 사장에게 개발이 끝나면 복귀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시마는 나중에 8080으로 불리는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을 위해 인텔에 합류하였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본격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결정적인 일들은 8080으로부터 시작한다. 파퓰라 엘렉트로닉스알테어 8080이 소개되어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것도 8080이 나오면서 부터다. 빌 게이츠도 이 기사를 보고 마이크로 컴퓨터의 세계로 빠져 들었고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 키트로라도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8080은 이른바 결정적인 칩이었다.

시마, 프로세서 전 공정에 관여

시마8008이 사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8008은 시스템 통합이 어렵고 주소공간 12비트는 너무 적으며 (적어도 16비트의 64K 공간은 있어야 했고) 스택 크기도 작고 16비트 연산도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레지스터도 모자랐다.

고칠 점들이 많았다. 시마테드 호프(Ted Hoff), 스탄 마조(Stan Mazor), 페데리코 파긴(Federico Faggin)을 포함한 5명의 연구진들은 거의 매일 모여서 새로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성격을 규정짓기 시작했다. 설계는 그 다음의 일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새로운 프로세서의 구조 확정이 필수적이었다. 사람들이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쉬워 널리 사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칩의 정의가 끝나자 레이아웃이 필요했는데 새로운 프로세서 8080의 레이아웃이 엉망이었다. 개발자 모두 시간이 없는 와중이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72년 12월초에 정의작업이 끝나고 레이아웃은 다음해 1월2일까지 마무리 짓기로 했다. 레지스터 파일 같은 것도 2주만에 빠르게 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회로를 손으로 그리고 집까지 들고 와서 회로 시뮬레이션을 실시하였다. 논리적 시뮬레이션은 실시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레이아웃도 엉망이지만 제조공정이나 칩의 설계과정에서 프로세서처럼 임의로 배치되는 게이트 설계에 숙련된 사람들이 인텔에는 없었다. 미숙련에 가까운 마스크 디자인팀에 의해 도면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에러는 시마가 하나씩 찾아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제조공정에서 실수가 일어났다. 원인을 발견하고 마침내 칩이 동작하였으나 또 내부적인 오류가 있었다. 시마는 현미경을 보면서 테스트 칩의 그라운드 부위의 합선된 곳을 잘라냈다고 한다. (결국 시마는 프로세서를 정의하고 로직을 디자인하고 레이아웃과 회로를 설계하고 마스크 제작까지 관여한 셈이다. )

8080의 설계 후 시마와 그의 팀은 급하게 주변 칩들을 설계했다. 컴퓨터 칩을 만지게 되면서 필자가 아무리 보아도 타이밍과 프로그래밍이 이상하게 보이는 주변칩의 설계는 그 당시 급하게 만들어진 것들이다(timer (8253), interrupt controllers (8259), DMA (8257), 그리고 UART (8251), Parallel I/O (8255)). 이 칩들은 1970년대에 사용되었고 80년대 IBM PC 설계 시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최신의 인텔 계열 주변 칩셋 속에 남아 있다. 이 주변칩들은 펜티엄 4나 그 이상으로 프로세서가 발전한 지금에도 PC의 호환성을 위해 칩셋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73년 8080이 처음 나왔을 때에는 많은 기술적 문제가 있었지만 생산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인텔 내부에서는 혹시 내부적인 설계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큰 결함은 없었다고 한다. 1974년에 본격적인 양산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시장에는 경쟁자가 없었고 칩을 크게 비판하는 사람도 없었다.

칩의 가격은 높은 마진을 갖는 300달러 선으로 정했다. 그 다음에는 칩의 판매가 성공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인텔은 8080의 판매에 성공했다. 인텔은 8080을 성공적으로 출하하면서 최초의 DRAM, 최초의 EEPROM, 그리고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모두 상용화시키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 해에 인텔은 세계 5위의 반도체 기업이 되었다.

1973년에 8080과 주변 칩셋이 개발될 무렵 더 큰 기업이었던 모토로라는 엉성한 접근 대신 확실한 레이아웃과 더 좋은 구조를 갖고 설계에 임했다. 8080의 라이벌인 6800이라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40명의 인원을 투입하여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인텔보다 안정된 프로세서를 만들었으나 인텔이 주변칩까지 모두 개발을 끝낸 그 해에 모토로라는 6800 CPU만 개발을 끝낼 수 있었다. 그 해에는 오일 쇼크가 있었고 시장이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겨우 이듬해에야 발매를 시작한 모토로라는 출하량이 적어 상대적으로 칩 가격을 높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모토로라에게는 불운이었다. 몇 년 후 IBM PC가 개발되기 시작할 때에도 IBM은 모토로라의 칩을 쓰고 싶었지만 모토로라 팀은 1년 정도 지나서 샘플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IBM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인텔은 이 당시에도 8080의 16비트 확장버전이나 마찬가지인 8086/[w:Intel 8088|88]]을 공급할 수 있었다. 칩 성능은 모토로라 측이 훨씬 더 나았다고 전해진다. 6800의 후속작인 68000매킨토시에 사용되었다.

8080과 그 후속작인 8085는 2억 개 이상이 판매되었다. 그러나 자일로그(Zilog)라는 회사에서 개발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는 90년대 중반까지 적어도 5억 개 이상 판매되었다. 자일로그는 파긴이 인텔을 떠나서 만든 회사이다.

자일로그와 Z80

파긴은 업무 시간이 일정치 않아 인텔 내 지각자 명단에 자주 오르곤 했었다고 한다. 회사는 점점 통제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가 파긴을 좌절에 빠뜨렸다고 한다. 우선 그가 페어차일드에 있을 때 개발한 실리콘 게이트 공정이 인텔 메모리 사업의 토대가 되었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스톡 옵션도 다른 엔지니어와 마찬가지로 1000주만 배정받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파긴이 페어차일드에 있을 때 개발하고 있던 이른바 'buried contact' 기술을 당시 그의 상사였던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여 인텔에 권리를 위임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파긴은 이 문제를 따졌으나 당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결국 앤디 그로브(Andy Grove)가 중재에 나섰으나 파긴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긴 이 외에도 랄프 웅거만처럼 마이크로프로세서에 몸담고 싶어 인텔에 들어 왔으나 정작 인텔에서는 일반 프로젝트에 투입된 엔지니어도 있었다. 웅거만은 당시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입사했을 당시 마이크로프로세서 회로 설계자는 2명이었다고 한다. 회사의 강압적인 정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웅거만은 그의 스톡옵션 행사 당일에 주식이 폭락함에 따라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불만과 좌절이 더욱 쌓이게 되었다. 이들은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인텔을 떠났다. 얼마 후 시마도 인텔을 떠났는데 시마는 인터뷰에서 그가 인텔을 떠난 이유가 오일 쇼크 때문이라고 했다. 인텔의 주식이 70달러에서 16달러까지 폭락함에 따라 더 이상 인텔에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또 파긴이 떠나자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과 비즈니스를 이해하는 사람이 인텔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없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후 시마는 자일로그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회사를 나올 때만 해도 특별히 염두에 둔 아이템은 없었다. 얼마 후 석유재벌인 엑슨이 이들에게 150만 달러를 지분의 51%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투자했다. 파긴은 처음에는 4004를 연구하다가 나중에는 8080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8080이 시장에서 매우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일반적인 용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지 않은 것이 실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1974년 둘은 8080의 업그레이드를 사업 아이템으로 잡았다. 우선 회사를 나올 때의 나빠졌던 관계를 생각해서 파긴앤디 그로브와 레스 바데스에게 찾아가 공동개발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대신 인텔을 방문하면서 시마로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자일로그의 Z80은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서 9개월 만에 칩 설계를 끝내고 웅거만과 시마가 상세한 회로를 좀 더 설계했다. Z-80은 모스텍의 설비를 이용하여 생산되었다. 자일로그의 칩은 인텔칩보다 우수했고 8080 명령어와 호환되었다. 초기 8080 설계에서 미비했던 점들을 모두 고쳤고 명령어도 추가되었다. 시장에는 200달러에 판매되었다.

8비트 세대

8비트의 주력 CPU였던 Z80CP/M (MS-DOS의 8비트 버전에 해당하는 8비트 점유율 1위의 운영체제) 을 돌리는 수많은 컴퓨터와 MSX 게임기와 컴퓨터, 오락실의 오락기와 휴대용 오락기, 산업용 기계, TI-99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퍼스널 컴퓨터의 두뇌였다.

아울러 한정된 예산으로 정보시대의 흐름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자국민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각국 정부들이 8비트 퍼스널 컴퓨터를 어떻게 보급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준 CPU 이기도 하다.(자일로그가 Z80을 충분히 싸게 공급했고 라이센스 생산을 허용했기 때문에 Z80은 어디에서나 사용되었다.) 영국의 경우 BBC에서 컴퓨터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크게 인기를 모았다, 그래서 BBC 마이크로라는 퍼스널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팔렸다. (이 기종은 애플과 같은 6502였다.)

컴퓨터의 가격도 싼 편이 아니었다. 일본의 경우 1979년 NEC서 발매한 PC-8001이 168,000엔, 샤프MZ-80C이 268,000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대졸 초임의 2-3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삼성이나 금성에서 만들어진 8비트 컴퓨터는 80년대초에 수십만 원이 넘어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의 시장은 어디까지나 정부가 주도했고 국내의 대기업들이 MSX를 만들게 된 이유도 정책 때문이었다. 교육용으로 지정하자 납품물량이 생기고 대기업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한 것이다. 정책이 바뀌자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 당시의 역사는 언젠가 또 다른 평가와 조망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본과는 또 다른 문화를 갖게 되었고 XT를 주력기종으로 정하자 우리나라는 이제 IBM PCMS-DOS를 교육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ASIC은 학원의 필수적인 코스였다, 여기에 MS-DOS를 지루하게 가르치는 과정이 덧붙여졌다. 왜 BASIC을 집요하게 가르치려고 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몇 년 사이에 200-300 달러에서 몇 달러로 떨어지고 계산기에서 퍼스널 컴퓨터로 용도를 바꾼 기계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작 무엇에 쓸지는 모르지만 미래에 중요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다음 호에 계속)


제공 : DB포탈사이트 DBguide.net

출처 : 경영과 컴퓨터 [2007년 6월호]


  1. http://www.ieee.org/web/aboutus/history_center/oral_history/abstracts/shimaab.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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